- ▲ 김태익 논설위원
어떤 말이 외국에서 온 것이니까 우리말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에는 언어민족주의가 깔려 있다. 그러나 대중이 하나의 말을 선택해 사용하는 데는 민족주의 말고도 작용하는 것들이 많다. 언어의 효용과 경제성 같은 것들이다. '함바'가 쉽게 없어지지 않는 것은 그것을 이길 만한 우리 말 어휘를 찾거나 만들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의료계는 최근 눈알·지라·단단입천장 등 4년 전 순 우리말로 바꿨던 신체 부분 명칭 상당수를 안구(眼球)·비장(脾臟)·경구개(硬口蓋) 등 한자어로 되돌린다고 밝혔다. 어린이들이 자주 걸리는 '손입발병'도 다시 '수족구병(手足口病)으로 부르기로 했다. 관계자는 "무리하게 한글 낱말로 바꾸면서 어색한 부분이 많았다"고 했다.
어떤 사물이든 오랜 정서와 사고(思考)가 녹아 있는 제 나라 말로 표현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이는 거저 되는 게 아니다. 대상을 가장 쉽고 아름답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을 찾기 위한 고심에 찬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광복 후 '국어순화'란 이름으로 한자나 일본어, 영어에서 온 말을 우리말로 바꾸려는 시도는 수도 없이 있었다. 그런데 성공보다 실패가 많았던 것은 이것들이 충분한 준비와 고민 없이 이뤄져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때 중·고교 과학시간에 화성암(火成岩)·수성암(水成岩)·변성암(變成岩)을 '불에 된 바위', '물에 된 바위', '변해 된 바위'라고 가르치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이름들은 자리를 잡지 못했다. 반면 같은 시기 '평방(平方)'을 '제곱', 체적(體積)을 '부피'라고 바꾼 것은 확실하게 살아남았다. 성패(成敗)는 결국 그 말을 쓸 소비자들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제곱'은 '평방'과 싸워 이길 힘이 있었던 반면 '불에 된 바위'는 '화성암'에 비해 설득력도 없고 경제적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한자말을 우리말로 잘 바꾼 대표적인 경우는 '달항아리'가 아닐까. 일인(日人)들이 '백자대호(白磁大壺)'라 불렀던 조선시대 도자기에 달항아리란 이름을 지어준 이는 미술사학자 고(故) 최순우 선생이었다. 보름달처럼 크고 원만한 모양새와 달빛 닮아 은은하게 희고 소박한 항아리의 아름다움을 이보다 잘 드러내는 이름이 있을까.
마침 국립국어원이 각 전문 분야에서 쓰이는 한자어와 외국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는 대대적인 작업에 나선다고 한다. 내년까지 17억원을 들여 14개 분야 전문 용어 22만개를 우리말화한다는 계획이다. '달항아리' 같은 말들만 찾아낸다면 20년 걸리면 어떻고 170억원이 들면 어떨까. 너무 서두르고, 목표를 크게 잡는 것 같아 오히려 불안하다. 우리말로 바꾸는 것 자체보다 우리말로 어떻게 바꿀 것이냐가 더 중요하다. 철학자 시인 등 말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과도 지속적으로 머리를 맞대면 좋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