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2월 27일 한겨울.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가운데 한 명인 장욱진(1917~1990)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주변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화백은 죽음을 미리 예견할 걸까. 숨을 거두기 몇 달 전 `밤과 노인`이라는 작품에서 그는 소복을 입은 노인을 그린다. 마치 금방이라도 저승으로 떠날 듯한 모습이다.

장욱진 선생 맏딸인 장경수 씨는 아버지가 타계하셨다는 소식에 이 그림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고 한다. 작품을 처음 대했을 때 멈칫했던 그 기분이 비로소 이해됐다는 말이다.

장욱진의 20주기를 맞아 회고전이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14일부터 열린다. 이번 회고전에는 각 소장처에서 모은 유화 60여 점이 전시된다. 이 가운데 미공개작 5점도 나와 전시 공간이 더욱 풍성해졌다.

종이에 그린 먹그림 10여 점 가운데 하나는 화백이 타계하기 한 달여 전에 그린 그림이다. 명태 여러 마리가 막대기에 꽂혀 있는데 새 한 마리가 상공을 시원하게 날아간다. 힘찬 붓질의 여운이 강렬하다.

1남4녀 중 맏딸인 장경수 경운박물관 부관장은 지난 7일 간담회에서 "이번 전시를 통해 15년 만에 처음 보는 그림도 많아 이산가족을 만나는 것 같다"며 "한때는 아버지이자 가장으로서 무책임한 것에 원망도 많았다"고 과거를 떠올렸다.

화백은 술에 취하면 "나는 누구냐, 너는 누구냐"고 가족에게 물었다고 한다. 이 말은 여전히 살아 있는 화두처럼 여전히 싱싱하게 들린다.

이번 전시 출품작은 하나같이 조그맣다. 화백은 작은 그림을 좋아했고 그의 작업실도 크지 않았다. 성은진 갤러리현대 큐레이터는 "동시대 화가인 유영국과 김환기가 순수 추상으로 간 반면 장욱진은 서양화를 공부했지만 끝까지 형상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작은 그림을 따라 걷다 보면 웃음이 절로 입가에 걸린다. 시대적으로 6ㆍ25전쟁이 한창인 1951년 그가 그린 `자화상`에는 시대적 위기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황금 들녘에 프록코트를 입은 신사 한 명이 경쾌하게 걸어간다. 그 뒤에는 강아지와 새 네 마리가 따라간다. 그림에 빠진 절대 고독의 세계는 이렇게 눈부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미공개작 5점도 주목받고 있다. 1953년작인 `소`(15×23㎝)는 엽서 두 장 크기인 아주 작은 작품이지만 붉은색과 황토색 색채가 선명하다.

장욱진 그림에는 어린이와 가족 나무 새 달 등 일상적이고 소박한 소재가 등장한다. 단순한 삶을 추구했던 작가 모습이 화폭 속에 고스란히 반영된 셈이다.

이번 전시는 장욱진 초기 작인 1940년대 작품부터 1990년 생애 마지막 작품까지 아우른다.

정영목 서울대 교수는 "장욱진은 김환기 유영국 이중섭과 마찬가지로 서구식 미학 개념으로서 화가가 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간 유학 2세대군 작가"라며 "그러나 그는 과거지향적이며, 관념적인 이상과 전통을 추구하고, 그림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의 순진무구한 조형적 표현을 선호한다"고 평가했다.

작가는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났으며 1954년부터 1960년까지 서울대 미대 교수로 봉직한 뒤 줄곧 한적한 시골 덕소와 수안보 신갈 등지에서 오로지 그림에만 전념했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박수근 45주기 전시로 큰 호응을 얻은 갤러리현대와 장욱진 미술문화재단이 공동 주최하는 것으로 다음달 27일까지 열린다.

전시에 맞춰 출판사 마로니에북스는 장욱진 영문판 화집을 출간했다. 장욱진 이름을 딴 미술관도 내년 경기도 양주에 들어설 예정이다. 관람료 성인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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